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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캉이가 사는 물길의 600년 — 부산 북항으로 읽는 한국사

부산 북항 친수공원에 눌러앉은 흑상어 부캉이. 그 물길 옆 1부두 자리는 조선 최초의 개항장 부산포, 임진왜란의 첫 전장, 1876년의 개항장, 관부연락선 잔교, 피란수도의 관문이었습니다. 북항 한 곳으로 삼포 개항부터 임시 수도까지 기출 포인트를 시대순으로 꿰어 봅니다.

부산 북항 친수공원 경관수로에 지난 9월 18일부터 몸길이 3m 암컷 흑상어 한 마리가 눌러앉아 있습니다. 부산시설공단이 "북항에서 발견된 상어"라는 뜻으로 부캉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한 달 만에 누적 방문객이 150만 명을 넘었습니다. 세 차례 유도 작전 끝에 10월 21일 수로 밖으로 나갔지만 그날 밤 되돌아왔고, 당국은 추가 작전을 접고 상어가 스스로 외해로 나가기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부캉이가 헤엄치는 수로는 부산역 바로 앞입니다. 그 서쪽 끝에 맞닿은 낡은 부두가 부산항 제1부두입니다. 1912년에 만들어져 관부연락선이 닿았고, 해방 뒤 귀환 동포와 6·25 피란민이 내렸으며,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라 있는 곳입니다.

한능검에 "부산"이 직접 나오는 문항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삼포 개항, 초량 왜관, 부산진 전투, 강화도조약의 개항장, 임시 수도 부산은 전부 이 바다 한 곳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부캉이가 머무는 물길을 따라 600년을 시대순으로 걸어 보겠습니다.

먼저 연표부터

연도 북항에서 일어난 일 시험 연결
1407 부산포·내이포 개항 조선 전기 교린 정책
1426 염포 추가 → 삼포 개항 세종
1443 계해약조 세종, 세견선 50척
1510 삼포왜란 → 임신약조(1512) 중종
1592 부산진성 전투(정발) → 동래성 전투(송상현) 임진왜란의 첫 전투
1609 기유약조, 부산포 왜관만 재개 광해군
1678 초량 왜관 설치 조선 후기 대일 무역
1876 강화도조약 → 부산 개항 최초의 근대적 조약
1905 경부선 개통, 관부연락선 취항 러일전쟁 직후
1912 부산항 제1부두 준공 일제의 수탈 통로
1921 부산 부두 노동자 총파업 1920년대 노동 운동
1945 귀환 동포 입항 광복
1950~53 피란수도 부산 1,023일 6·25 전쟁
1978 자성대부두 개장 (국내 첫 컨테이너 전용 부두) 수출 주도 성장
2008~ 북항 재개발 → 친수공원 개방(2023) —
2026 부캉이 출현 —

조선 전기 — 왜인에게 열어 준 세 항구

고려 말부터 왜구가 극성이었습니다. 조선은 토벌과 회유를 함께 썼습니다. 토벌이 1419년 이종무의 쓰시마(대마도) 정벌이고, 회유가 포소 개항입니다. 1407년(태종 7) 부산포와 내이포(제포)를 열고, 1426년(세종 8) 염포를 더해 삼포가 됩니다. 삼포에는 왜인이 머무는 왜관을 두어 교역과 접대를 이곳에서만 하도록 묶었습니다.

그 규칙을 정한 것이 1443년 계해약조입니다. 세견선 50척, 세사미두 200석. 시험에서는 숫자보다 "세종 때, 쓰시마 도주와 맺었다"는 자리가 중요합니다.

약조 연도 계기 결과
계해약조 1443 삼포 개항 뒤 교역 규정 세견선 50척 · 세사미두 200석
임신약조 1512 삼포왜란(1510) 제포만 개항, 세견선 25척
정미약조 1547 사량진 왜변(1544) 부산포만 개항
기유약조 1609 임진왜란 뒤 국교 재개 부산포만 개항, 세견선 20척

흐름은 한 방향입니다. 왜변이 날 때마다 항구가 줄어 결국 부산포 한 곳만 남습니다. 그래서 조선 후기 대일 교역은 전부 부산 이야기가 됩니다.

삼포왜란(1510)은 중종 때, 을묘왜변(1555)은 명종 때입니다. 을묘왜변 뒤 비변사가 상설 기구가 되는 점이 묶여서 출제됩니다.

임진왜란 — 전쟁이 시작된 바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 선봉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고, 이튿날 부산진성이 무너집니다. 첨사 정발이 전사했습니다. 부산진성은 지금의 동구 좌천동, 북항 바로 뒤편입니다. 다음 날 동래성에서는 부사 송상현이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답하고 전사합니다. 한능검이 즐겨 쓰는 그림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가 바로 이 두 장면입니다. 전쟁의 전체 흐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총정리에서 다뤘습니다.

일본군은 7년 동안 부산을 병참 기지로 썼고, 부산진성 옆 언덕에 왜성을 쌓았습니다. 이 언덕이 자성대이고, 뒷날 북항 컨테이너 부두의 이름이 됩니다.

전쟁 뒤 1609년 기유약조로 국교가 다시 열리지만 왜관은 부산포 한 곳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두모포(지금의 동구 수정동)에 두었다가, 터가 좁고 수심이 얕다는 이유로 1678년(숙종 4) 초량으로 옮깁니다. 이것이 조선 후기 대일 무역의 창구 초량 왜관 이고, 교과서 삽화 「왜관도」가 그린 곳입니다. 지금의 용두산공원 일대입니다.

같은 시기 조선 통신사도 여기서 배를 탔습니다. 부산진성 앞 영가대에서 바다 신에게 해신제를 올리고 쓰시마로 출항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영가대는 일제강점기 철도와 전차 공사로 헐려 사라졌고, 지금은 자성대공원의 조선통신사역사관 옆에 복원되어 있습니다.

"초량 왜관을 통해 일본과 교역하는 상인"은 조선 후기의 모습입니다. 삼포 시절 왜관과 헷갈리게 만드는 선지가 자주 나옵니다. 삼포는 조선 전기, 초량은 조선 후기로 기억하세요.

1876년 — 왜관이 개항장이 되다

1875년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이 맺어집니다. 개항장은 부산·원산·인천 세 곳. 부산이 가장 먼저 열렸고 원산(1880)과 인천(1883)이 뒤따릅니다. 부산에는 이미 초량 왜관이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가 그대로 일본인 전관거류지로 바뀝니다. 조선이 200년 동안 왜인을 가둬 두던 울타리가 거꾸로 일본인 도시의 중심이 된 셈입니다.

거류지는 곧 좁아졌습니다. 1902년부터 1909년까지 일본인 회사가 지금의 중앙동 앞바다를 메우는 북빈 매축을 벌였고, 1905년 1월 경부선이 개통됩니다. 처음 종착역은 초량역이었고, 매축으로 생긴 땅 위에 1908년 부산역이 들어섭니다. 기차가 바다에 닿는 도시가 된 것입니다.

강화도조약의 조항 세 가지는 그대로 선지가 됩니다. 조선은 자주국, 부산 외 두 항구 개항, 해안 측량권과 영사재판권. 자세한 내용은 개항기·대한제국 총정리에서 다뤘습니다.

1부두와 관부연락선 — 식민지의 현관

경부선이 개통한 1905년 9월 11일,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잇는 관부연락선 첫 배 이키마루가 부산에 들어옵니다. 기차가 끝나는 곳에서 배가 떠나는 도시는 부산뿐이었습니다. 이 둘을 한 지점에 묶기 위해 일제가 1912년 완공한 것이 제1부두입니다. 부두 위까지 철도를 끌어와 기차에서 내려 바로 배를 타는 잔교역이 있었습니다.

이 부두로 일본 유학생이 떠났고, 쌀이 실려 나갔고, 1930년대 후반부터는 징용·징병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이 지나갔습니다. 반대로 들어온 것은 일본 상품과 일본인 이주자였습니다. 1926년 성악가 윤심덕이 이 뱃길 위 현해탄에서 생을 마친 일도 당시 널리 알려졌습니다.

부두는 노동 운동의 무대이기도 했습니다. 1921년 9월 부산 부두 노동자 총파업은 1920년대 노동 운동의 출발점으로 교과서에 실려 있고, 1929년 원산 총파업과 짝으로 출제됩니다.

2025년 12월, 북항 재개발을 위해 1부두 서쪽 땅을 파다가 1912년 당시의 철도 침목과 잔교역, 관부연락선 접안 시설의 윤곽이 드러났습니다. 20세기 초 항만 시설이 땅 위로 올라온 것은 국내에서 처음이었고, 보존과 리모델링을 둘러싼 논의가 아직 진행 중입니다.

광복과 피란수도 — 돌아온 사람들, 떠밀려 온 사람들

1945년 광복 뒤 일본과 중국에서 돌아오는 귀환 동포가 1부두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5년 뒤에는 방향이 바뀝니다. 6·25 전쟁으로 정부가 부산으로 옮겨 와, 1950년 8월 18일부터 10월 27일까지, 그리고 1·4 후퇴 뒤 1951년 1월 4일부터 1953년 8월 15일까지 모두 1,023일 동안 부산이 임시 수도였습니다.

1부두는 유엔군 병력과 보급 물자가 내리는 관문이었고, 흥남 철수로 실려 온 피란민이 거제도와 부산에 내렸습니다. 전쟁 중 부산에서 벌어진 정치 사건이 부산 정치 파동과 발췌 개헌(1952)입니다. 임시 수도 부산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강행한 사건으로, "전쟁 중의 사실"을 묻는 문항의 단골입니다. 전쟁 전체의 순서는 6·25 전쟁 총정리에 있습니다.

부산시는 2022년 임시수도 정부청사, 경무대(대통령 관저), 유엔묘지, 아미동 비석 피란주거지 등과 함께 부산항 제1부두를 묶어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 9곳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렸습니다. 등재 목표는 2028년입니다.

컨테이너와 재개발 — 다시 열린 바다

1978년 자성대 왜성 아래 바다에 자성대부두가 문을 엽니다. 국내 첫 컨테이너 전용 부두였고, 1970년대 수출 주도 성장이 실제로 배에 실려 나간 자리입니다. 그러나 2006년 부산 신항이 열리면서 북항의 화물 기능은 서쪽으로 옮겨 가고, 2008년부터 1~4부두와 중앙부두 일대를 시민 공간으로 바꾸는 북항 재개발이 시작됩니다. 2023년 11월 부산역 앞 친수공원이 전면 개방되었고, 2024년에는 자성대부두가 46년 만에 운영을 끝냈습니다.

그렇게 비워진 물길에 2026년 9월 부캉이가 들어왔습니다. 유도 작전에 밀려 수로 밖으로 나갔을 때 머문 곳도 1부두 앞바다였습니다.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는 이것을 구경거리가 아니라 기후 변화의 경고로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다가 따뜻해져 어종의 분포가 북상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600년 동안 사람과 배만 드나들던 북항이 그 신호가 처음 눈에 보인 자리가 됐습니다.

시험에는 이렇게 나온다

  • 약조 순서 — 계해약조(1443, 세종) → 임신약조(1512, 삼포왜란 뒤) → 정미약조(1547) → 기유약조(1609, 광해군). 임진왜란 전후로 나눠 두면 틀리지 않습니다.
  • 왜관 시대 구분 — "삼포에 왜관 설치"는 조선 전기, "초량 왜관에서 교역"은 조선 후기. 「왜관도」 그림이 나오면 조선 후기 경제 문항입니다.
  • 개항장 순서 — 부산(1876) → 원산(1880) → 인천(1883). 부산이 먼저인 이유는 왜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임시 수도 부산 — 부산 정치 파동·발췌 개헌(1952)은 전쟁 중, 사사오입 개헌(1954)은 전쟁 후.
  • 노동 운동 짝 — 1921 부산 부두 노동자 총파업, 1929 원산 총파업. 둘 다 1920년대입니다.

부캉이 관련 내용은 2026년 10월 23일 기준입니다. 상어는 수로 출구에 쳐 둔 차단막 주변을 오가고 있습니다.